
[더구루=정예린 기자] 네덜란드 장비 업체 'ASML'이 지정학적 긴장과 수출 통제가 반도체 산업의 혁신을 저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로 미·EU 간 통상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유럽 기술 산업 전반에 불확실성이 확산되고 있다.
12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크리스토프 푸케 ASML최고경영자(CEO)는 지난 3일(현지시간) 네덜란드에서 열린 산업 행사에서 녹화된 영상 메시지를 통해 "반도체 산업은 사람들이 협력하고 함께 혁신할 수 있는 능력을 기반으로 구축됐다"며 "하지만 지정학적 긴장과 수출 통제 조치가 이러한 협력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밝혔다.
푸케 CEO의 발언은 행사 약 2주 전 사전 녹화된 영상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새로운 관세 정책을 직접 겨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메시지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 발표 직후 공개되면서,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유럽 산업계의 우려를 상징하는 발언으로 해석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 상호 관세 정책을 공식 발표했다. 이에 따라 모든 수입품에 기본 10%의 관세가 부과되며, 한국(26%), 유럽연합(EU·20%), 일본(24%) 등 주요 무역 상대국에는 더 높은 관세가 적용된다. 국가별 고율 관세는 당초 지난 9일부터 실행될 예정이었으나, 미국은 중국을 제외한 국가들에 대해 90일간 유예 기간을 두기로 했다. 이 기간 동안은 기본 관세율 10%만 적용되며, 협상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국가별 고율 관세가 발효된다.
'트럼프식 관세'에 반도체 완제품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반도체 장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도 빠져 있어 ASML을 비롯한 장비 업계 전반에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ASML측은 관세 조치에 따른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는 ASML의 미국 내 고객사 비중과 투자 인센티브 등을 고려할 때 중장기적인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제기된다.
실제 ASML은 작년 전체 매출의 약 16%를 미국 내 고객사에서 거뒀다. 인텔, 삼성전자, TSMC 등 주요 고객사들은 미국 내 생산설비 투자를 확대하고 있으며, 이들은 2022년 제정된 칩스법(CHIPS Act)에 따라 반도체 장비 구매 시 최대 25%의 투자 세액공제를 받고 있다.
한편, 트럼프의 고율 관세 발표로 인해 네덜란드를 포함한 EU와 미국 간 통상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레이네트 클레버 네덜란드 외무통상부 장관은 "최근 워싱턴에서 미 무역대표부(USTR)와 회담을 갖고, 상호주의에 기반한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며 "EU는 대응 조치 패키지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다만 ASML 장비에 대한 관세 예외 요청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