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구루=홍성일 기자]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전임 정권의 핵심 기후 정책이었던 자동차 연비 기준을 대폭 후퇴시켰다. 전기차 구매 보조금 폐지에 이어 완성차 연비 규제까지 대폭 완화되면서 미국의 전기차 보급 속도는 한층 더뎌질 전망이다. 이에 북미 시장에 대규모 설비 투자를 단행한 국내 배터리 3사의 셈법도 한층 복잡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29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2031년형 승용차 및 경트럭(픽업트럭, 스포츠유틸리티차)의 평균연비 기준을 갤런당 34.9마일(약 14.8km/L)로 확정했다. 이는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설정됐던 목표치인 갤런당 50.4마일(약 21.4km/L)에서 대폭 완화된 수치다.
이외에도 NHTSA는 오는 2028년형 모델부터 완성차 제조사 간 규제 준수를 위해 거래되던 '배출 크레딧 거래 시스템'을 전면 폐지하기로 했다. 2030년부터는 차량 분류 기준을 재조정해 콤팩트 크로스오버 등 일부 인기 차종을 승용차군으로 편입해 관리하기로 했다. 배출 크레딧 거래 시스템이 폐지되며 완성차 제조사들은 타사 크레딧 구매나 전기차 강제 생산 압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반면 차량 분류 기준의 경우 그동안 느슨한 경트럭 기준을 적용받던 소형 SUV·크로스오버 차종이 승용차로 분류되면서 연비를 개선해야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이번 연비 기준 완화는 트럼프 행정부의 반(反)친환경 드라이브 행보의 연장선상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든 정부 시절 수립된 기후 정책을 '전기차 강제 의무화'로 규정하며 "소비자에게 터무니없는 부담을 지우고 신차 가격을 끌어올리는 주범"이라고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출범 직후 연비 기준 미달 시 부과되던 과징금을 무력화한 데 이어, 전기차 구매자에게 제공되던 7500달러(약 1000만 원) 규모의 세액공제 혜택도 폐지했다. 나아가 미국 환경보호청(EPA)의 온실가스 규제 근거였던 '위해성 판단(Endangerment Finding)'마저 철회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 제정된 위해성 판단은 온실가스 배출이 인류의 건강과 복지를 위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지난 17년간 미 행정부 온실가스 규제의 법적 토대로 기능해왔다.
규제 완화 소식에 미 당국과 현지 전통 완성차 업계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숀 더피 미국 교통부 장관은 "미국 가정에 값비싼 전기차를 강요하던 정책을 종식하고 신차 가격 부담을 낮췄다"고 자평했다. 존 보젤라 자동차혁신연합(AAI) 회장 역시 "시장 현실에 부합하는 적절한 궤도 수정"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환경단체를 중심으로는 소비자 부담이 도리어 가중될 것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환경단체 시에라클럽(Sierra Club) 관계자는 "미국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물가 안정인데, 트럼프 행정부는 완성차 업체에 오염 면죄부를 주고 일반 가정에는 유류비 증가라는 청구서를 떠넘겼다"고 비판했다.
미국 정부가 사실상 전기차 의무화 조치를 폐기하면서 북미 현지에 대규모 생산 기지를 구축해온 K-배터리 기업들의 하방 압력이 커지게됐다. 미국 전기차 시장은 정책 변화와 맞물려 전환 속도가 크게 둔화한 상태다. 올 2분기 미국 내 신차 판매량 중 순수전기차 비중은 5.8%에 불과했다. 유럽(1~8월 누적 기준 21.7%)과 중국(신에너지차 비중 65% 상회)과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다만 국내 배터리 업계가 전기차 전환 정체에 발맞춰 북미 생산 라인을 에너지저장장치(ESS)용으로 기민하게 전환하고 있어 타격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최근 미국에서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증설과 신재생에너지 확대로 ESS 신규 설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에 LG에너지솔루션은 북미 ESS 생산 능력을 올해 50GWh에서 2030년 100GWh까지 확대할 계획이며, 삼성SDI는 스텔란티스 합작사인 스타플러스에너지를 통해 ESS용 배터리 생산을 확대하고 있으며, SK온 역시 현지 공장을 거점으로 비차량용 배터리 장기 공급 계약을 확보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