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식어버린 복지국가 바람, 다시 일으키려면

  • 등록 2019.02.20 16:24:20

이상호 내가만드는 복지국가 사무국장

[더구루= 기자] 뜨거웠던 복지 바람이 식었다. 지난 2012년 대선 때만 해도 보수정당 후보조차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약속했던 뜨거운 바람이었다. 정의로운 복지국가, 역동적 복지국가 등 어떤 복지국가인가를 두고도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10년 무상급식 논란을 거치며 국민들도 보편적 복지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됐다.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즈음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인사로 주고받던 때와는 사뭇 달라졌다. 이제는 ‘함께 살자 대한민국’이 시대정신인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복지국가가 눈앞에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복지국가 이야기를 주변에서 좀처럼 들을 수가 없다.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이끈 촛불 혁명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그렇다. ‘모두가 누리는 포용적 복지국가’는 새 정부의 여러 국정 과제 중 하나일 뿐이다.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라는 더 높은 국정 목표에 따라 적폐 청산에 힘을 모으며 일 년을 보냈다. 올해는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북한 핵 문제에 관심이 더 쏠릴 것이다. 물론 적폐 청산과 북한 핵 폐기는 꼭 풀어야 할 숙제다. 고민은 그러한 숙제를 푸는 동안에도 여전히 국민들의 삶이 팍팍하다는 데 있다. 동시에 놓치지 말아야 할 문제다.

 

개헌 논의 속에서도 복지국가 이야기는 없다. 헌법은 통치 체제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은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이다. 또 나라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그런데 지금의 개헌 논의는 통치 체제, 즉 권력 구조에만 몰두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라는 논의가 빠져 있다.

 

나라는 부유한데 왜 국민은 불행할까

 

이렇게 복지국가 논의가 실종되다시피 한 까닭은 우리나라가 이미 복지국가이기 때문일까. 복지 제도로만 보면 우리는 이미 복지국가 문턱에 들어섰다. 질병 때문에 상실된 소득을 보전해 주는 상병수당을 빼면 기초생활보장제도와 네 가지 사회보험, 그리고 급식·보육과 같은 사회서비스, 기초연금과 아동수당에 이르기까지 복지국가로서 골격을 이미 갖췄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아동수당을 지급하고, 건강보험 보장 수준을 확대하고, 기초연금이 오른다. 1인당 국민 소득도 3만 달러를 넘었다. 대한민국은 세계 11위 경제대국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여전히 사는 게 힘들다고 한다. 65세 이상 노인들의 절반이 빈곤하다. 인구 10만 명당 노인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최고다. 청년들은 어떨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N포세대, 헬조선과 같은 자조 섞인 말들이 유행할 정도다. 일할 곳이 없고 미래가 불안하다. 출산율 또한 유례없이 낮다. 아이를 낳아도 키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어렵다고 한다. 자연스레 ‘나라는 부유한데 왜 국민은 불행할까’하는 물음이 나온다. 사회적 위험에 대비하고, 모두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복지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지 현주소, 복지에서 배제된 사람들

 

지금 우리 복지가 어디쯤 왔기에 이럴까. 또 어떤 과제를 풀어야 복지국가로 갈 수 있을까. 먼저 복지 제도가 있더라도 여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 문제다. 우리나라 복지의 중심은 연금·의료·요양·실업·산재를 책임지는 사회보험이다. 사회보험은 전체 복지 지출의 80%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그럼에도 이 사회보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대표적으로 국민연금의 경우 사업장 가입자는 67.4%에 불과하다. 이 중 정규직이 82%, 비정규직 가입률은 36.9% 밖에 안 된다. 노인들도 사정이 나쁘다. 65세 이상 노인 중 국민연금을 포함해 군인, 공무원, 사학연금 등 공적 연금을 받는 노인은 41.1% 수준으로, 절반 이상의 노인이 이러한 공적 연금 혜택에서 제외된다.

 

가난한 이들을 보듬는 복지는 어떤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수는 2015년 기준 전체 국민의 3.2%로, 절대 빈곤 상태에 놓인 7.9%의 절반이 안 되는 사람들만 간신히 챙기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부양의무자 기준을 일부 완화하더라도 이 비율은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생계급여 등 보장 수준 또한 낮아서 이들의 삶은 여전히 궁핍하다. 급식, 보육, 기초연금, 아동수당 등 보편적 사회서비스와 사회수당 예산은 대폭 늘어난데 비해 빈곤층, 장애인 등 어려운 이들을 위한 복지 예산은 여전히 제자리다. 보편적 복지 열풍에 맞춰 빠르게 이런 저런 좋다는 복지를 새로 내놓다보니, 복지조차 중간 계층과 빈곤층의 간극이 생긴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복지의 ‘불균등 발전’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고 중간 계층이 살만하다는 건 아니다. 의료, 교육, 주거, 노후 보장 등 나라에서 제공하는 복지가 실속이 없다보니 시장에서 복지를 사적으로 구매한다. 열 가구당 여덟 가구가 이미 실손보험과 같은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해 있다. 한 가구당 평균 4.8개의 보험에 가입해, 한 달에 보험료로 30만 원을 쓴다. 한 달 평균 10만 원인 국민건강보험료의 3배를 보험사에 내고 있다. 국민건강보험으로 의료비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다 보니 따로 민간보험에 의존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복지의 질 문제까지 불거지고 있다. 급식, 보육, 요양 서비스 현장에서 종종 낮은 질 문제가 거론된다. 제도를 도입하는 데 급급하다보니 복지의 질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 하지만 복지의 질은 곧 국민들의 신뢰 문제와 직결된다. 국민들이 복지를 신뢰하고 지지해야 복지국가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꼭 풀어야 할 과제다.

 

사회 연대, 복지국가로 가는 길

 

요약하면 우리나라 복지는 제도적으로 꼴을 어느 정도 갖췄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부실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복지에서 아예 배제돼 있거나 나라가 보장해야 할 복지를 사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복지의 질 문제도 빼 놓을 수 없다. 이대로는 제대로 된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국민 모두가 세금이나 사회보험료를 지금보다 더 내더라도 복지를 양적·질적으로 대폭 확충해야 한다. 우리나라 공적 지출 규모는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최소한 연간 1백조 원 이상 복지 예산이 더 필요하다. 특정 계층에만 한정해 세금을 올려서는 마련하기 어려운 돈이다. 빈곤층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소득 수준에 따라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더 낼 필요가 있다. 의료비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민간 보험사에 내는 보험료의 3분의 1만 국민건강보험료로 돌리면 된다.

 

사적 복지에 의존하지 말고 공적 복지에 투자해야만 지금의 저부담-저복지 상태를 벗어나 중부담-중복지, 나아가 고부담-고복지의 보편적 복지국가로 갈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사회 연대’ 의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절반이 넘는 국민들이 ‘복지를 확대한다면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다’고 한다. 더 내는 만큼 복지는 늘어나고 복지국가는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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